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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와 착각, 그리고 망상과 환상 덧글 0 | 조회 1,293 | 2009-04-17 00:00:00
해암연구실  


오해와 착각, 그리고 망상과 환상

세상을 살면서 오해(誤解)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피로 맺어진 가족 사이에서도 오해는 있다. 그러나 증거가 나타나면 비 온 뒤에 다져지는 땅처럼 가족 관계는 더욱 돈독해진다.
착각(錯覺)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삼십 오 년 전의 일이다.
대학 합격자 발표의 두루말이 방(傍)(주-1)이 풀리며 붙여지는데 나의 번호가 가까이 다가오자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머리를 떨어트렸다. 나의 번호는 거기에 없었던 것이다. 참담한 무게에 짓눌려 교문을 나서려는데 친구들이 덤벼들었다. 합격을 축하한다는 것이다. 어리둥절한 나는 놀랬다. 그리곤 확인했다. 이게 웬 일인가. 거기, 나의 번호가 있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보아도 착각이지만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보아도 착각이다. 분필을 보고 담배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막대기 사탕쯤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모두 착각이다. 벽에 걸린 하얀 치마저고리를 보고 귀신이라며 놀라는 경우도 그렇다.
그런데, 안타까운 현상은 망상(妄想)과 환상(幻想)이라는 것이다.
오해는 증거를 대면 곧 풀린다. 착각은 그가 보고들은 것을 정확하게 재연해서 용도와 의미를 제시하면 역시 미소를 짓는다.
망상과 환상은 오해나 착각의 사촌쯤 된다. 없는 것을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을 없다고 믿거나 보고 듣는 현상에선 차이점이 없다. 결과론이지만 망상과 환상은 매우 난감하다. 만인이 공감하는 증거를 제시하여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특징이 있다. 오히려 또 다른 의심을 한다.(주-2)
의처증이 늘어나고 있다. 의부증(疑夫症)도 마찬가지다.
외간 남자와 놀아난다고 믿고있어 그렇지 않다고 증거를 대면 반문한다. 죄가 없으면 그냥 넘길 터인데 뭘 그렇게 자상하게 설명하느냐고 그 자체가 수상한 증거라 한다. 답답해서 입을 봉하면 변명할 여지가 없으니 별수가 있겠냐며 역시 자신의 확신을 수정하지 않는다. 복통이 터져 쥐어박거나 병이라고 입원을 시킬라치면 이젠 말로 안되니 폭력과 구속으로 미친 사람 취급을 한다고 난리다.
정신과 의사가 늘 만나는 사건들이다. 피해망상, 부정(不貞)망상, 과대망상, 빈곤(貧困)망상, 종교(宗敎)망상 등등 환상과 더불어 치료가 까다로운 것은 당연하다.
오늘의 세태를 들여다본다. 오해나 착각이 아니라 망상과 환상 속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 신념과 철학과는 관계가 없는 이 황당한 현상은 전염병처럼 번져가고 있다.
사회적 병리가 상당한 몫을 담당한다. 개인의 정신 병리가 우선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히 일부 정치가들의 고질적 피해망상과 과대망상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면책특권을 앞세워 우선 뱉고 보는 행태(行態)에 젖어 그게 아니라고 하면 오만가지 엉뚱한 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굽히려하지 않는다. 정치가로서 특히 수장(首長)이나 재벌 기업의 회장은 막강한 권위로 자신의 생각이 언제나 옳다는 망상으로 넘기고 본다. 그게 버릇이 되었고, 전염병처럼 서민에게까지 퍼지고 있다. 불신(不信)의 대가다.
문제는 이들 망상과 환상에 의한 행위는 생명을 좌우하는 결과로 발전해도 형법 제10조(주-3)에 따라 그들의 책임능력을 인정할 수 없어 죄를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의의 피해자가 속출할 지경이다.
미국의 경우 대기업의 회장과 의사(意思) 결정을 하는 중요한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심리적 상황을 체크할 수 있는 장치가 있다. 전담 정신과 의사나 임상 심리학자가 고용되고 있는 것이다. 크고 작은 조직의 장이 망상이나 환상에 빠져 초래될 결과는 그 조직의 흥망과 직결된다. 결코 소홀히 취급할 수 없는 문제다.
의심스런 사람은 쓰지 말일이요, 사람을 썼거든 의심하지 말라는 선인들의 말이 있다.
정계(政界)에선 전연 통하지 않는 말이며, 때만 되면 오합지졸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모습에서 먹혀들 얘기가 아니다. 우리의 기업체도 역시 무용지물이다.
감히 정신과 의사의 자문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해당되는 것이 실정이 아닌가.
내가 어디가 어때서?
그저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내가 1954년 방(傍)에서 나의 합격 번호를 놓진 것이 참이라고 믿고 친구들이 공연히 위로한다거나 더 나아가 비아냥거리기 위한 짓이라고 여겼다면 대체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주-1): 2002년 현재 합격자 발표는 컴퓨터를 통해 나온 A4용지로 안내판에 실리거나 ARS 전화나 인터넷으로 알게 된다. 1954년엔 붓글씨로 큼직하게 쓴 합격 번호 두루말이가 서울대학 문리과대학 본부(현재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1, 2층 사이 화강석 띠에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풀리면서 붙여지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수험생과 부모들 사이에 환성과 쾌재가 터져 나오곤 했다. 당연히 낙방의 초췌한 모습은 더욱 많았으나 사람들의 시선 밖에 있었기에 들어 나지 않았을 뿐이다. 당시 의예과 경쟁률만 해도 7.4:1이었으니까 한 사람의 환호를 위해 6명이 울어야 한 것이다.
(주-2): 2002년 2월 말경 개봉되었던 Beautiful Mind에서 환각의 세계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나타나고 있다. 자신만의ꡐ오리지날 아이디어ꡑ를 찾아내기 위한 ‘존 내쉬’는 섬광 같은 직관으로ꡐ균형 이론ꡑ의 단서를 발견하여 훗날 경제학 노벨상을 받는다. 1949년 27쪽 짜리 논문을 발표한 20살의 청년이 정신분열병을 겪으면서 얻어낸 노벨상은 하루아침에 학계의 스타로, 제2의 아인슈타인으로 떠오른 결과지만 그 아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신과 의사의 치료가 없었다면 역시 ‘균형 이론’은 세상에 빛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3): 일반적으로 죄가 성립하려면 일단 문제될 행위가 있어야 함은 물론 그 행위가 構成 要件 該當性 및 違法性을 갖춘 동시에, 그 행위자에게 責任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행위가 형법상 문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 행위와 결과간에 因果關係가 있어야 하지만, 더 나아가서 형법상의 구성요건에 해당하여야 한다(17조). 형법은 이 구성요건을 크게 둘로 나누어 규정하였는데, 그 하나는 故意犯이고(13조), 또 하나는 過失犯이다(14조). 과실은 법률이 규정한 경우에만 처벌하도록 하였다. 또한 위법 행위가 구성요건에 해당하더라도 違法性阻却事由가 있으면 법을 어기지 않은 것이 된다.
형법은 위법성 조각사유로 正當行爲(20조) ․正當防衛(21조) ․緊急避難(22조) ․自救行爲(23조), 피해자의 승낙(24조)을 규정하였다. 위법한 행위가 있은 경우에 그 행위자는 非難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이 곧 책임이다.
그러나 그 행위자가 14세 미만인 경우(9조), 心神障害者(10조) 또는 聾啞者(1l조)인 경우에는 그 책임이 조각되든가 減輕된다. 또한 강요된 행위도 책임이 조각된다(12조). 일반적으로 행위는 作爲인 경우가 보통이지만, 위험한 결과의 발생을 방지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 자는 부작위로써도 그 죄를 물을 수 있다(18조).
심신장해자(10조)에 따르면 바로 망상이나 환각에 의한 행동으로 위법성이 인정된다 해도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다. 죄를 물을 수 없다는 뜻이다.

정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