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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떠날 수 있게 될 것인가? 덧글 0 | 조회 2,222 | 2022-07-10 00:00:00
관리자  

언제 떠날 수 있게 될 것인가?

2022.07.10.

정신과의사 정동철

 

 

 

분명 기뿐 날이 될 것이다. 우린 서로 흡족한 웃음을 품고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가 바라는 나와 내가 바라는 그를 만날 수 있음이 분명하리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너와 내가 아니라 나와 나다. 태어났을 때의 나와 숨을 거둘때의 나 사이다.

힘겨웠던 건 사실이다. 아품을 견디며 이겨내는 것이 힘겨웠던 탓이다. 그러나 이제 그 아픔대신 우린 하나가 된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 미리 정한 곳을 자유롭게 오가며 지날 수 있어서다.

갑자기다. 목줄기를 타고 불꽃이 치솟는다. 바로 머리를 휘돌아 눈앞이 후끈 어지럽게 맴돈다. 순간적이다. 뿐인가 빙글거린다. 늘 그래왔다. 누웠다 일어나거나 좀 힘에 부치지 싶은 감이 들면 매미소리와 함께 몰아친다. 너무 힘들다. ~ 정식으로 유언을 남겨야 할 때가 왔다는 느낌이 강하게 몰아친다. 오늘 아들을 만나러 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이어지던 꿈 간밤에 우주 어딘가에 종착역에 이르렀다. 매우 환상적 힙팝처럼 빠르게 만화같이 뚜렷해진 우주, 놀림이 매우 확실하게 빠르다. 우주적 만화같은 내용 더욱 현실적이다.

거기 나를 중심으로 아들과 또 몇 사람, 서너명이 몰린다. 이름까지 뒤따랐다. “勳魔()인가? 나를 부르는 듯 그러나 아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핵심은 미완의 어린 시절과 보다 완숙해진 죽음으로 향하는 두 모습이 성숙한 죽음 직전의 모습 하나로 통합된 마왕(魔王)으로 발전하는 내용이다. 곧 죽음에 관한 것이다. 죽음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란다. 어떤 모습으로 헤어졌던 반쪽의 나, 우주 어디선가 나와 합쳐지느냐는 의미다. 이별이 아니다. 아들과의 상징적 만남도 아니다. 없어짐은 더욱 아니다. 본래의 하나 즉 하나의 나로 합쳐지는 것이 운명의 순간이란다. 그런 운명도 있나? 세상을 위해 특별히 심사숙고 기여했고 늘 돕고 살았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태어났던 나와 이제 다중(多重)우주던 평행(平行)우주던 우주적 개념에 존재할 지구상 역할이 끝난 나, 세상에 태어남과 떠남 이 둘이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위해서 환갑을 중심으로 이미 준비되었고 더욱 가속, 인간 본연의 바람직한 존재를 향해 달려가는 현재의 나는 깊은 환희를 실감하고 있다. 거의 완전무결한 이타적 존재가 미완의 또 다른 나와 하나가 되는 것, 마치 우주상의 별들의 원초를 밝힌 최근 NASA의 우주망원경을 통해 우주 최초의 상황을 보듯 말이다. 변화가 우주의 완성을 향할 수 있듯..

참고: 빅 뱅으로 시작된 우주, 138억년 전 태초의 빛을 드디어 찍었다. NASA7/11 발표한 사진, 그것은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넘나들며 우주탄생의 비밀을 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 본문에서 자주 나오는 미시세계, 바로 빅뱅은 점()이 터진 것, 얼마나 작은 것일까? 우리는 미시와 거시란 상대적 환경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제임스웹 우주망원경(JWST)므로 밝혀진 우주, 나의 글에서 나오는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다. (2022.07.12. 조선일보) 인체의 오감이 교차하는 물리-전하/화학적 현상에서 원자의 세계를 이해한다면 미시세계는 거시세계와 함께 모두 이해될 것이다.

 

그것은 분명 꿈에선 나를 의미한다. 아들의 이름 자체가 세상을 위한다는 뜻이라 했기에 죽음과 동시에 하나가 되는 그 나머지 쪽과 우주와 조화를 위해 세상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 모두 하다 합치되는 곳, 바로 거기에 죽음이 있다. 아들과의 하나 됨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나의 죽음엔 세상과의 작별이란 의미는 없다. 무의미하다면 그 자체가 헤어짐일 뿐이다.

어떻게 세상을 위해 나를 사용했으며 위했었는지 그것은 벌써 부터 시작된 것이다. 바로 청춘들이 말하는 노후를 즐기기 위한 조기 은퇴 시점, 파이어족의 그곳은 있어야만 했던 이유다. 태어나자마자 일수는 없다. 세상에 뒤엉켜 살면서 정신과 육체가 각기 겪게 되는 경험으로 체득되어 세상 누군가를 위함으로 이어지고 있는 뜻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하나로 합치기 전까지의 진행형이다.

늦어도 70부턴 시작됐어야 했을 것이다. 환갑의 의미가 여기에 부합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나름 느긋하게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온 셈이라 그렇다. 바등거리며 내 몫 찾지 못해 어리버리 주체하지 못함이 아니어서다. 적극적 세상 위함은 그러나 한참 미급한 듯 예상을 넘지 못했음에도 지금까지 멀쩡해 보이는 연유는 그 지속성의 원천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아들, 겨우 정신을 차린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거름걸이 와는 다르다. 외형이 우선하는 듯 한숨 마음을 돌린 것일 뿐, 바쳐줘야 할 대상은 나의 몫이다. 때에 한풀 꺾여나가는 힘, 아들을 의심한다고? 딴 세상! 아들의 착각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물론 이러나 저러나 아들과 나는 별개의 개체다.

어제 손녀가 출국했다. 아내(할머니)와 전화, 신랑감이 여기서 살면 너무 좋겠다고 할 정도. 며느리가 애썼을 것이다. 기쁨이다. 병원은 대대적 수리 중이다. 6층엘 들어가 보니 실감, 다시 시작되는 10, 명치가 춤춘다. 숨이 돌아간다.

 

아직 유서는 아니다. 일상적 유서 이미 몇 번 썼을 것이다. 다른 의미의 유언.

얼마 전 아들에게 했던 말,

아버지, 지금 묘자리에 너의 할아버지 묻히기 전 엄청 목 놓아 울고 또 울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었다는 얘기, 당시는 상여가 있었다. 뒤따르며 묘자리 앞에 올라가서까지 조용하고 담담했지. 막상 무덤속으로 내려가자 흙을 누군가 덮을 때, 바로 그때부터다. ‘안된다며 발광(?) 통곡을 내뱉기 시작했었다는 것.

왜였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다.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른다고..

퍽 궁굼했던 듯 아들은 다시 되물었다.

실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아버지란 존재와 함께 찍은 사진 자체가 아예 없다. 대학입학, 그리고 예과 졸업식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 남남이었다. 생활비는 물론 학비를 보태준 적도 없다. 겨우 9번째인지 10번째 부인만이 의예과 졸업식에 참석했었다. 결과 나의 어린시절은 평양은 물론 두만강넘어 도문까지 어려있다. 어머니와 정초 제삿날만은 지켰던 아버지, 그러나 말싸움이 늘 뒤따랐다. 6.25 피난, 그걸 따로 갔을 정도로 남남, 부자지간이 아니었던 셈이다.

 

대성통곡하며 몸부림까지 치고 또 쳤던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간접 살인자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결과적으로 죽인 아들인 셈이다.

지금은 알레르기성 폐질환으로 치료도 되는 병이나 당시 해소는 치료법이 없었다. 다만 의과대학에 입학한 나에겐 에페드린이란 약이 매력적이었다. 우선 기침발작을 멈출 수가 있었다는 정보다. 의예과지만 수소문해서 약을 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방학이면 가곤하던 시골, 언제나 빈손 평범 그 자체였다. 알면서 죽음을 외면한 셈이다. 간접살인이란 자체 의견이었다.

나의 아들이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할까?

 

신랑감도 봤다. 서로 결혼을 바라고 있다. 좋았다. 한데 며느리와 두 친구만 다녀간 후 전연 소식이 없었다. 7월에 간다 하더니 떠났나? 바로 떠나는 날 아들에 물으니 손녀의 전화가 아내에게 왔다. 아주 자상한 목소릴 들을 수 있었단다. 왜였을까? 전과 달리 이렇게 뜨악, 아니 남남처럼 되다니.. 행여 결혼이 깨졌나. 아니다? 아니였다. 아내는 흡족했다.

언젠가 며느리가 아내에게 말했다는 얘기, 우리 집은 아파트가 아니라 했단다. 지금 내 수준(의사)의 아파트라면 판자촌 형이 아니라 전연 다른 형편이어야 한다는 것. 그러고 보니 밴쿠버에 있을 때 아내에게 하곤 했던 말, 친구나 주변의 한국인들은 부모가 20~30억 자리 집을 해주는 것은 상식, 대개가 그렇다는 것이었다. 이 후진 아파트를 찾아 몸만 버리지 않겠냐는 것일까? 설마? 모를 일이다. 손녀와 자식들에겐 용돈 바로 푼돈에 불과했으니 감사하고 자시고 그런 수식어가 뒤따를 이유가 없었다, 그럴 것이다. 오해? 그렇겠지. 핵심은 우린 부모가 아니란 의미에서만 같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딸처럼 여기겠다는 아내와의 약속은 며느리에겐 단단히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때에 유서란 단어가 뇌에 다시 튀어 올랐다. 아니 그래서 떴을까? 기업 채용에도 등장한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 요즘 20~30MZ 세대 83%내 성격과 일치라며 탄성이란다.

탐색도 좋지만 맹신은 금물이이라고 전문가들은 인정하지 않는 설문지다. 나도 인정하지 않는다. 한데 대기업에선 우리와 잘 맞는 인재를 찾겠다고 높이 평가, 요지경이다. 아주 딴 세상 왕왕 푹 숙으러드는 경향들, 채용이 거부당하니 필수 관문을 원망한다. 뿐인가 맥주를 마셔도 MBTI 응용 문구가 인쇄되었으면 대박이 나는 형편, 과연 그럴까? 사주(四柱)까지 거기 합세하는 형편, 또다시 요지경! MZ세대 나 자신을 돌아보자며 명상과 심리상담에도 몰려들고 있다. MBTI 맥주·비누·호캉스까지, 성격 맞춤형 상품 쏟아지는 연유란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MBTI 자체의 특성에 주목, 궁극적으로는 그들 자신에 대한 탐구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 기본적으로 MZ세대는 미 제너레이션(Me generation)이라고 불릴 만큼 타인보다 나 자신에 대해 관심집중.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엔 내가존재하며, 선택의 기준 역시 자신이 언제나 우선시 된다는 것 바로 문제점이다. (최샛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중앙Sunday-22.07.09)

 

MBTI 또는 마이어스-브릭스(비전문가) 지표(Myers-Briggs Type Indicator)는 개인이 쉽게 응답할 수 있는 자기보고서, 문항을 통해 인식하고 판단할 때의 각자 선호하는 경향을 찾고, 이러한 선호 경향들이 인간의 행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파악하여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도록 제작된 심리 검사란다. 할때마다 다른 결과가 나오는 문제가 있다. 정신과적 증상을 검사하는 SCL-90(김광일 정신과교수)이나 MMPI 같은 심리검사는 유용하게 나는 잘 활용했지만 평가엔 매우 인색했다. 결과 20~30년 된 환자가 지금도 다닌다. 증상보단 완전히 독립된 주관적 주체가 되기 위해서다. MZ 세대에게 그런 의미는 필요가 없을까? 거듭강조한다. 임기응변의 즉흥적 충족감으로 족한 까닭, 만족스런가? 다시 요약 MBTI 유형을 통해 자신의 유형을 16가지 중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 캐서린 쿡 브릭스(Katharine C. Briggs)와 그녀의 딸 이저벨 브릭스 마이어스(Isabel Briggs Myers)가 제작하였다. 카를 융의 성격 유형 이론을 근거로 하였다. 이 검사는 내향성 또는 외향성, 감각 또는 직관, 사고 또는 느낌, 판단, 지각의 네 가지 범주를 참고하여 지정하고 있다. 그 결과를 자신의 필요에 꿰마춘다?(위키백과)

결혼할 손녀가 왔었다고 했다. 한데 며느리와 두 친구만 다녀간 후 전연 소식이 없었다고도 했다. 7월에 간다하더니 떠났을까? 바로 전날 아들에 물으니 전화가 아내에게 왔다. 아주 자상하게 손녀의 목소릴 들을 수 있었다. 왜였을까? 전과 달리 이렇게 뜨악, 아니 남남처럼 되다니.. 결혼에 혼선? 아니다.

언젠가 며느리가 아내에게 말했다는 얘기, 우리 집은 아파트도 아니라고 했단다. 지금 우리 아파트는 판자촌과 유사하다고 했던가? 캐나다에 있을 때 친구나 주변의 한국인들 얘기를 했던 점. 둘을 합하면 이제 그 너절한 아파트를 찾으면 마음만 상하지 않겠냐는 것일까? 설마.. 모를 일이다. 손녀와 자식들에게 사소한 선물을 주고 감사하고 자시고 그런 수식어가 뒤따를 필요가 없었던 과거, 그럴 것이다. 오해? 그렇겠지.

핵심은 우린 부모도 아니란 의미만 같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입을 봉하고 있을 일 달리 도리가 없다. 생색낼 일? 그런 적도 없지만 현실은 꼭 그렇게 흐르고 있는 것만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MBTI 지표는 개인이 쉽게 응답할 수 있는 자기보고서 문항을 통해 인식하고 판단할 때의 각자 선호하는 경향을 찾고, 이러한 선호 경향들이 인간의 행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파악하여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도록 제작된 심리 검사라 했다. 전문가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했다. 나도 그렇다. 할 때 마다 다른 결과가 나오는 형편엔 이유가 있어서다. 정신과적 증상을 검사하는 SCL-90이나 MMPI 같은 성격검사는 유용하게 잘 썼지만 평가엔 매우 신중했고 결과 20~30년 된 환자가 지금도 다닌다 했다. 증상보단 완전히 독립된 주관적 주체를 찾기 위해서다. MZ 세대에게 그런 의미는 필요가 없다? 거듭 강조한다. 임기응변의 즉흥적 충족감으로 족한 까닭일 것이다.

 

결혼할 손녀가 왔다가 소식이 없었다고 했다.

신랑감도 이미 봤다. 좋았다. 한데 며느리와 두 친구만 다녀간 후 전연 소식이 없어 쭝긋, 7월에 간다하더니 떠났나? 우린 부모도 아니란 의미만 같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입을 봉하고 있을 일과 달리 사실은 아니었다. 오해!!! 해서 유서란 단어가 뇌에 떠오르다니. 소갈딱지 하고.. 행여 죽기 싫어서?

 

그러나 뜯어 보니 나에겐 거시적 일상의 죽음이란 현상은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미시적 정신세계는 쉽게 풀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이해될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다. 하지만 나의 육신과 정신활동을 이루고 있던 수조억 개의 미시적 원자들은 분명히 이 우주에서 살아지지 않고 존속할 것만은 분명하다. 아인슈타인의 정신세계가 우주 어디서건 미시적 그의 원자세계가 없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와 같다. 때에 하나의 의문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의 나의 유전자 DNA와 미시적 원자세계, 그것과 죽음이란 현상을 만나야 하는 시점에 나의 정신적 미시세계와 어떤 차이점과 상관관계가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은 만만치 않다. 양편 모두 없어지진 않았다. 다를 수는 있다. 작동 말이다. 믿음과 의심, 사랑과 미움, 베품과 욕망, 서로 상반되는 현상들의 차이점은 수학적으로 얼마나 커다란 크기로 남아 증명될지 그것은 의문이다. 허준이 교수(22년도 필즈상 수상자. 여성 물리수학자 에미 뇌터-1935 사망, 상대성이론에 공헌. 여성차별시대)는 수리적으로 어떤 결론을 내릴까? 여기서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사회적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미시적 원자세게의 변천사다. 역사적 의미는 고사하고 당대의 현상학적 풀이도 되고있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가령 불안(不安)이란 정서가 원자적 이치를 이해하고 그래서 약물치료가 가능하기는 하나 샅샅이 알기엔 너무나 역부족이 현실이다. 더구나 나의 뇌기능은 시대적 구분에서 6.25 전쟁을 중심으로 변했고(1950~1954-대학입학-깡통에서 벗어남) 7(2005)에 사회적 절정기 명사(名士)반열의 변곡점을 맞는다. 각각 미시적 원자세계가 나의 뇌에서 어떻게 작동하였을지 그것을 풀어내는 것은 지금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론적 배경은 대충 이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같은 이야기는 의미를 갖는다. 다시 이런 배경을 묶어 70(7)를 중심으로 태어날 때의 나와 죽을 때의 나 두 구분의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두 나의 만남이 죽음이란 사건을 지나면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해명하려는 목적은 그래서 가능하고 그러기에 죽지 않고 이어지는 미시세계를 생각하면 종교철학같은 논리를 전개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종교는 물론 아니다.

 

이제 분명한 것은 새로운 결론에 이른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80세 전후로 그 이전과는 달리 방금 전에 말한 서로 상반된 두 나는 생사시 미시적 정신세계는 거의 하나로 회귀함을 맞는 것이 분명하리라 다지려는 것이다. 예정보다 오래 살고 있는 현상 자체가 바로 그런 것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분명하게 이해되는 사회성 중에 하나는 정치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학회 회장이라든가 동문회 회장같은 단체장이란 것도 정치적 색갈은 있다. 그러나 나는 임기 내 스스로 사임하곤 했다. 능력의 문제라 지적받을 수 있지만 미시세계에 미쳐지는 영향은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 보단 험집이 클 것이다. 하물며 나라의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분들, 거기엔 응분의 권력과 재산상의 이득이 발생할 것이 분명하다. 그것들을 표방하는 것과 달리 죽음을 통해 하나로 조용히 통합하는 미시세계로 이어지기엔 난해한 문제점들이 절대적일 것임에도 위장되곤 한다. 결코 고요한 행복만 뒤따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단체와 나라를 위해 헌신이 발휘됐다면 사정은 다르다. 바로 여기서 주장하는 의미와 같을 것이다.

나름대로 논리적 미시세계를 정립해 본다. MZ가 아니라 50-60대의 A(Aspiration) 세대, 백화점과 전기차를 지배하는 세대, 앞으로 사회에 미칠 영향, 정치적으로도 존경받는 변화가 생길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 MZ 세대는?

-미식플렉스에 빠진 N포 세대 파이어족 되려다 계좌 0원으로의 전락 조기 은퇴하지 못하고 극단적 단절의 선택으로 가는 불행한 죽음, 과욕과 의심과 증오란 미시적 정신세계로 빠지지 않고 믿음과 신뢰와 사랑을 통해 베푸는 A세대의 출발점을 시발로 한 결과가 될 길처럼 거길 향해 가는 시점을 일찍이 잡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자문이다. 바로 그것이 이전과 달라진 새로운 인생의 희망이란 점을 다 같이 이해할 수 있다면 바로 이른바 천국이 될 것이다. 반드시 종교적 의미를 의미하는 천당과 지옥을 뜻하진 않는다. 출생시의 자신과 이 세상을 떠날 때의 자신이 결국 하나로 합쳐지게 되는 미시세계, 바로 신세대의 새로운 미래가 될 것이란 점에서다. 자신이 가야할 완성된 자신을 이루기 위해 베풀고 사랑하는 시간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일 것이다. 늙었지만 나와 아내는 며느리를 딸로 인정하리라 약속하고 이해해가고 있음이 한 예다. 그것은 종교가 아닐 수 있다. 철학적 형이상학적 의미를 강조하는 사상만도 아니다. 미시적 물리세계의 현상을 터득하고 이해하는 것임을 말한다. 본래의 우주현상의 진행을 이해하고 순응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치적 의도성과 배려는 오히려 커다란 한계다. MZ 세대의 대체적 허점일 수 있다.

 

어렵고 힘겨운 삶의 현장에서 다만 미시적 물리세계를 주시한 결과임을 거듭 강조한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깨달아 이른바 은퇴 시점을 분명히 하면서 바로 그때부터 하나의 나를 위해 세상을 이해하고 베풀며 사랑하고 배려할 수 있는 공간을 확대해가는 것이다. 바로 그런 기점을 설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한다. 한마디로 우주 미시(微視)물리(物理) 의학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뜻한다. 양자(量子) 정신의학(情神 醫學)의 일부로 접근할 수도 있다. 사후의 의학이 아니라 죽기 전 생시의 모든 것이 진행 되어야 하며 하나가 된 후 생체 모든 분자는 원자로 환원되어 필요한 자리로 자연스럽게 오갈 것이다. 곧 진행형인 것은 물론 스스로 선택한 적극적 사후가 될 것이다. 뉘라서 뭐라 의도적 비자연적 조작의 역방향 즉 원자에서 분자로 가부를 말할 수 있겠는가? 거기 태어날 때의 DNA와 성장기의 실체와 가치관을 달리한 거의 완벽하게 다른 노년기의 생명력의 상실, 이른바 죽었을 때의 분자들이 원자로 환원됐을 과정을 거부할 현상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한다. 바로 하나인 것이다. 그 하나를 위해 스스로 선택한 노년의 일정기간의 삶이 겹칠 때 거기 삶의 진정한 의미가 그 존재의 의미와 함께 반짝이게 될 것이다.

 

달리 표현해 보자. 태어날 때의 나와 죽을 때의 나는 통상 둘은 아니다. 하나로 납골당이든 묘지에 존재한다. 엄격히 말하자. 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죽게 되는 나로 통일되는 하나의 나, 그것을 우주적 미시 물리세계의 현상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엔 이미 뇌에 그와 같은 과정이 익혀져 있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그때 걸맞는 사회정신적 특정 연령에 해당한 곳으로부터 죽음이란 하나로의 귀일을 다져가는 인생, 바로 그때 마주치게 될 의미가 존해할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의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숙고하는 인생, 우리는 거기에서 이 장황한 얘기를 불러낸 셈이다. 결국 언제 떠날 수 있게 될 것인가를 스스로 알아차려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때를 맞춰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 있어서다. (2022.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