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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흔들린다 덧글 0 | 조회 3,502 | 2021-09-23 00:00:00
관리자  

땅이 흔들린다

2021.09.22.

정신과의사 정동철

 어제 올릴 글, 홈페이지에 문제가 일시적으로 발생 해 

쓴 날자와 차이가 생겼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흔들리지 않는 땅은 없다. 우주 자체는 고정불변상태가 아니다. 당연히 내가 딛고 있는 땅 지구라고 예외일 수 없다. 땅이 흔들린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문제는 흔들림에 익숙해 부지 부식 간에 나와 땅이 하나가 되었다가 홀연히 다시 흔들린다는 사실,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새삼 왜 무엇때문데 분리 흔들림을 느끼게 됐을까?

어제 용케도 대보름 달을 봤다. 남한산성 산마루를 막 박찰 땐 보이지 않더니 한참 올라와 본 달은 이미 작아진 상태다. 역시 변하고 있다. 그 이틀 전의 달은 그 자리가 아니었다. 보름달 둥근 달에 뭔가 기원할 의미가 있는 듯 보길 잘했다. 흔들려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경 달에서 본 지구 역시 변하리라. 하지만 그런 변화를 변화로 느끼지 못한 지금까지의 인생사, 새삼 땅이 흔들린다니, 왜지? 양자역학의 중첩에서 관찰자에 의해 파장이 입자로 보인다는 이치?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지상의 심리적 문제가 더 크지 않을까?

 

살며시 쏘파에 잠든 아내 옆에 앉아 오가는 생각들을 정리한다. 피곤했던 모양이다. 일요일 며느리가 손 하나 까딱하지 말라며 모든 걸 준비해 아들과 함께 왔다. 어려운 와중에 금일봉도 함께. 아들은 선산(先山)의 증,고조부(曾高祖父) 할아버지 묘를 말끔히 벌초까지 끝낸 터다. 세간에서 흔히 편하고 이기적이란 의사답지 않게 환자와 직원, 거의 400명에 이르는 식구들을 위해 추석 연휴를 홀로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다. 연휴 내내 병원을 떠날 수가 없다. 그 마음이 편할 리 없다. ‘모이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라는 청년들의 코로나 추석어록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일요일 대타를 이용해 선택했다. 어제 추석, 점심엔 둘째 딸 식구들 그리고 저녁엔 첫째 딸과 반려견 3마리와 함께 그녀의 가족이 왔다. 명절에 뭉치면 망한다 하니 모두가 깔깔거렸다. 둘째의 두 딸과 사위, 그녀의 첫딸은 의사다. 사위는 공학박사 30, 첫 임신 중이다. 태중의 가상 사진을 보며 놀랐다. 이내 나의 옛 내력이 마구 터져 나오는 바람에 웃음바다, 둘째의 둘째 딸은 PD. 넉넉한 살림은 아니나 행복한 가정이다. 이어 갈비구이를 준비하고 저녁에 온 첫째 딸 식구들, 그녀는 박사에다 사회사업과 교수였다. 그의 남편은 의사다. 그들의 외동딸 잘 나가는 스포츠강사다. 함께한 세 마리의 강아지가 옛 추억을 더듬는지 방방뜨며 휘젓는 모습 역시나 웃고 또 웃으며 떠들썩, 아내는 강아지를 안고 모두가 즐기는 시간이다. 추석이란 명철 부러울 것이 없는 화목한 식구들, 즐기는 가운데 나의 명치에 한계-오늘따라 딸들은 금일봉이 없었다, 대충 마무리 전 양해를 구하고 침대로, 아내는 몸은 편했으나 추석 일정 자체를 소화하면서 나름 피곤이 몰려왔던 모양이다. 숨 속에 들락거리는 소리 색색거린다. 행여 깰 가 옆에 앉아 한참을 바라본다. 우린 금년에 결혼 환갑(回婚)을 지낸 긴긴 세월이 스친다. 좋은 일만 있었을 리 없고 한데 미국에 유학 중인 두 친손녀 생각이 어른거렸다. 어제 본 달 속에 그들 모습을 그려봤을 듯, 첫째 딸 식구들이 저녁을 마치고 떠난 후 아내에게 이틀 전 봤던 달, 다시 챙겨 밤하늘의 달을 보라 했다.

행복한 가정 탈이 없는 평안한 가정, 그러나 걱정 없는 집 그런 인생 있으랴, 피곤했던 듯 오늘 아침 늘어진 긴 잠에 사람 사는 것 늘 거기서 거기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그런 것이 아닐까? 흔들림이란 여운은 아예 찾아들 틈이 없었다. 까만 세계 그래서 잊고 있었다. 모두가 다녀간 추석이기에.

 

때에 주목 경제라는 미묘한 신조어가 떴다. 본격적으로 흔들림이 몰아 첬다.

노르웨이 나그네쥐(Lemming, 직선행)의 자살행태(사실 그보단 왕성한 번식력으로 새로운 서식지를 찾아가다 수영깨나 하는 자신들을 믿고 우두머리를 영문도 모른 채 급히 뒤따르다 결국 낭떠리지를 만나 바다로 뛰어든 꼴 꼭 집단 사살같이 보였기로) 때문이다. 맏사위와 나누던 얘기 끝에 정치가들만 나무랄 일이 아니라 우리 국민 자체가 나그네쥐를 닮지 않았나 공감한 것이다. 이틀 전 아들 내외와 역시 같은 얘기 같은 결과 탓이다. 자의식(自意識), 정체성의 부재가 문제가 아닌가 여기는 공감은 아들에 이어 큰 사위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나 그리고 우리는? 우린 그렇다고 분명 예외일까?

뒤이어 다시 이어진 것, 아들은 의사이자 경영자, 너무 난해한 정책 자들의 두뇌, 애초 개원할 때 CCTV를 설치했더니 내둥 인가를 내주곤 인권을 무시한다며 돌연 제거하라는 명령, 한데 이제 와 반대로 인권을 위해 다시 설치하라는 지시다. 그뿐이 아니다. 병실마다 세수(洗手)대를 설치하라는 명령이다. 바로 옆에 커다란 대형 샤워실과 병동마다 입구에 설치된 세수대가 있건만 요식에 맞추라는 주문, 개설허가 땐 말이 없다가 보태주지도 않으면서 지시일변도다. 그들 머릿속엔 무엇이 있는지 기가 막힐 형편이다. 선진국이라 뽐내지만 의료수가는 하급에 속한다. 뿐인가 나라는 갈리고 집값은 천정부지에 먹고 살기도 고달푼 형편에 설마하니 데모 방지용(?), 가족 모임도 어쩧거나 몇 명 이상은 안 된다 한다. 정치적 여당 모임이나 노조의 집단집회는 느슨하기 짝이 없다. 제때에 백신도 맞지 못한 형편으로 뒤늦게 그렇게 반복됐던 주장 코로나와 함께(위드with-코로나)는 무시되고 비로서 거론단계다. 코로나 19감염증으로 고생하는 의료진 얘기는 말뿐, 뒤늦게 백신 후유증에 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의사들의 탈 히포크라테스 정신으로 비방하면서 해결할 길이 없는 의원급에 백신 부작용 대응이 말이 아니라는 울분의 방패막이가 되어야 한다. 주사를 놔주기로 위탁할 때의 한 약정을 모르새하는 당국, 어쩌란 말인가? 왜 의사가 됐는지 한탄, 자퇴하는 의대 학생수가 늘어나는 추세라 한다.

 

철새들의 수준을 보자. 그들이 수천 수만리를 여행하는데 그 방법은 가히 과학적이다. 지형을 보고 가기도 하지만 별빛 따라 또는 태양과 지구의 전자기 기판을 내장한 특별한 방법으로 저마다 멀고 먼 길을 날아다닌다. 새대가리만도 못한 정치가들? 그러나 인간은 본시 새대가리 지능에 비교될 형편이 아니다. 엄청 기로에 선 한국, 정의롭고 공정한 결단이 다부지게 필요한 현 시국에 물고 뜯으며 싸우는 건 견공만도 못한 형편, 요즘 인격화된 반려견은 그렇지 않다. 오죽하면 주목 경제라는 개념이 생겼을까. 내용인즉 가관이다. ()풀이 아니라 악()풀로 돈을 버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우선 주목부터 받고 보자는 것, 어떤 변호사가 100세 노인을 향해 너무 오래 살아 위험하다면서 100년 동안 안 하던 짓을 하니 노화 현상 참 딱하다고 하니 놀란 만큼 오히려 주목을 받는단다. 80세가 적당하다는 수명까지 제시하니 이미 80대 중반을 넘긴 나는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다. 죽기 싫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자살을 해야 하나? 핵심은 누가 어찌 됐든 악담과 악풀로 주목부터 받자는 것, 그로인해 월수입 400만원 까지 올린다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린다니 참으로 미묘한 경제원리다. 그 주인공들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인 셈, 온전한 세상인가?

늙은 꼰대 무능한 식충이라고? 두렵다. 무섭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오십 대 청춘까지는 이렇든 저렇든 나도 도전적으로 부닥치며 창의적으로 살아왔다. 늙었기에 무력해 용기를 잃어서가 아니다. 솔직히 팔십을 넘겨 대들 수가 없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패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성공하지 못했을 때 만회할 시간이 분명치 않음을 알고 있어서다. 후손들의 누가 될 경우를 고려하는 것뿐이다. 오로지 그뿐, 해서 리스크(위험)가 없는 공부와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근래 너도나도 양자역학이 요란하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물으니 뜰 앞에 잣나무(庭前柏樹)라 했겠다. 대체 뭔 얘기일까? 말의 노예가 되면 참뜻을 죽이는 것이고(不立文字), 글귀에 머물러있으면 스스로 미혹(迷惑-헷갈려 정신이 사납다)함이라 참뜻을 알 수 있을까? 양자컴퓨터가 개발될 형편에서인지 죄가 있고 없고는 나중이란다. 여론이 급하니 피의자로 우선 조사부터 하게 된다던가.. 나야 그 참뜻과 진실을 어찌 알겠는가? 알면 말이나 글, 정말 쓸모가 있으려나?

땀이 나면서 추운 기운, 묘한 늙은 나의 몸 상태다. 아인슈타인 1916년 논문에 중력파(重力波)는 빅뱅 현상이 마치 물에 돌을 던져 파장이 이는 것과 유사한 거라 했다. 나의 의견으론 논리상의 문제가 있음을 인식한다. 빅뱅 이전에 파장을 일으킬 물질(粒子)들이 이미 있었다는 뜻이 된다. 물론 40억년 후라는 단서가 있긴 하다. 빅뱅 이전에 천지는 파도를 일으킬 수 있는 뭔가가 있었어야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입자들이든 물이든.. 무에서 빅뱅, 그 후 빛보다 빠른 속도로 팽창하면서 무수한 입자들의 생성과 결국 지구까지 나타났음은 상식이다. 학력과 성향 이전에 인간의 밑바닥엔 인성(人性)이란 것이 있었을 것이다. ()에서 유()일뿐 유에서 무는 아니란 얘기다. 지식이 높다고 정이 넘치는 인성은 아니니 말이다. 바로 노인 나 같은 늙은이들의 입장일 것이다.

내가 숨 쉬며 느꼈던 세상, 분명 흔들렸으나 너무 길들어 흔들리지 않는다. 파도가 넘실대는 남지나해(南支那海)의 파도나 롤러코스트를 타지 않았으니 흔들릴 일도 없다. 늙은이의 변, 자신의 몸을 지탱하지 못해 어지럽기로 자신의 노화된 뇌 탓이련만 땅이 흔들린다 핑개라고, 또 늙고 늙은 노인의 주장을 나무랄 것이다. 날 두고 하는 말일까? 길게 늘어놓을 일은 아니다. 세상에, 아니 우주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했다. 다이아몬드에 입 맞추며 변치 말자던 사랑 그것은 실체다. ‘사랑이란 던어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이름 역시 변하지 않는다. 나의 주소지 자체도 그렇다. 하지만 나의 본성, 사랑의 본질은 변한다. 멀리 가지 말자. 원자(原子)는 변한다. 정신? 나는 원자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주 탄생, 생명 탄생 그리고 의식의 기원을 아직도 과학은 정확하게 그 실체를 모르고 있다. 여기에 의식의 정체를 알겠다고 덤빈 나, 동조하는 교수와 함께 논문들을 챙긴다. 어차피 거대한 실험물리학을 할 형편이 아니다. 아인슈타인도 이론 물리학으로 노벨상을 탔다. 이론의 전개는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다. 곳곳에 함정이 깔려있다. 무엇보다 모르는 함정은 사방에 무수히 널려있다. 과연 노인이 할 짓일까? 역시 허구라고? 관심은 울새가 그의 망막에서 해독한 지구 자기장을 읽어 먼 여행을 하듯, 아직도 모른다는 의식세계, 양자생물학을 통한 양자적 의식 기전을 같은 방식으로 풀어보려는 것, 가령 인간 망막 광수용체인 로돕신(rhodopsin)분자에서 양자적 중첩 현상도 광자(光子) 감지기능을 갖고 있어서다. 펜로저스(노벨수상자)의 뇌와 의식(1994)을 설명하는 미세소관(microtubule)은 제쳐놓더라도 당연히 거기엔 수학적 논리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해서 공대 교수의 도움을 받는 것, 미완 그 자체다. 노인이 뭘 더듬고 있는지 의문스럽다고?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인정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세상에 있을까? ? 변하지 말자는 법, 왜 그토록 자주 만들어 쌓고 쌓아두려할까? 땅이 몹시 흔들리는 이유다. 인간사회에선 그렇다는 것, 물론 그뿐 나의 한계다. 땅이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는 땅 그런 지구는 없다 했다. 24시간 자전과 공전은 그렇다 치고 하늘과 바다를 보면 어린이도 구름과 파도를 통해 금방 알 일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한데 법은 변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물론 그때뿐이다. 아니면 가두면 되니까.. 맞을까?

기러기들이 V자를 그리며 하늘을 난다. V자야 할까? 우두머리 기러기가 날게 짓을 하면 그 뒤에 생기는 난기류, 곧이어 상승기류란 과학적 현상을 이용해 뒤따르는 동료 기러기의 날게짓으로 살아질 에너지 15% 정도를 비축해주기 위해서다. 이치를 안다는 뜻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지속적 V자는 다시 그 뒤를 따르는 새들의 힘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편대비행을 하면 역시 15% 이상의 연료 소모가 줄어든다. 과연 새대가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 할비는? 그뿐이 아니다. 무리의 앞에 나르는 리더 기러기는 얼마나 힘들까? 뒤따르는 기러기들은 용기를 잃지 말라 함성의 응원가를 부른다. 정 힘들면 자리바꿈을 해서 힘이 돌아오면 다시 앞자리를 양도하는 방식으로 도와준다. 뒤따르는 기러기 중 중도에 기진맥진 낙하 직전, 그러면 바로 리더의 지시와 협동 정신으로 옆의 기러기 두어 마리가 합세 처지며 힘을 보탠다. 기운을 차리면 다시 원대 복귀, 아예 땅으로 떨어지면 함께 뒷 처리를 하고 다시 합류한다는 기러기들, 한데 인간 특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자영업자들의 애환은 낭만이 아니다. 죽기 살기 빚더미 속에 극단에 허덕인다. 40-50대 넉넉한 공무원들 과연 처진 기러기를 쳐다보기나 할까? 세금을 더 걷지 못해 안달, 더는 비참해지고 싶진 않다. 줄줄이 결국 끝없이 이어질 미래세대, 그들의 국민연금마저 희미해질 거라는 우리의 현실, 대체 기러기 무리를 이끄는 리더는 어디에 있는 걸까? 참새 크기의 울새(꼬까울새)만 해도 그렇다. 망막의 담백질(cryptochrome)로 지구 자기장을 읽어 유럽에서 한국까지 온다. 몇 년에 한 번 몇 마리에 불과하지만 그런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 써먹어야 의미가 있으련만 인간은 지구의 제왕이라 떠벌이며 한다는 것이 밟고 짓이기는 형편이다. 억대의 일부 노조원들이 빵을 나르지 못하게 때리고 운반 길을 막고 대체 어쩌자는 걸까? 누군가를 닮아선가. 북쪽이든 이곳 민주화 운동권의 승리든? 이념 즉 인성(人性)이 맞나? 아픔을 이겨낼 상담을 한다. 글을 쓰기도 한다. 불확실성을 챙기려 한다. 늙어 쓸모없다고? 허접한 분수를 알라고? 그래서 흔들린다는 착각, 그런 걸까?

법만 지키면 된다? 쏟아지는 법, 우리의 인생사 평온함을 위함일까?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얽혀 곤욕으로 불안만 늘리기 위한 건 아닌지, 새들보다 너무 다른 형편, 이래도 되는 걸까? 땅이 흔들리고 있다. (2021.09.22.)